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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정글/5학년 중늙은이의 희노애락

5학년 4반 중늙은이의 하루

by 유일무이태인 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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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20분만 되면 어김없이 알람이 울린다. 꿈나라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딱히 신나고, 흥미롭고, 재미있고, 판타스틱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기에 항시 미련 없이 눈을 뜬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나의 하루는 오전 720분에 시작된다.

 

오전 7시도 아니고 오전 730분도 아닌 오전 720분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갖다 붙인다면, 이쁜공주가 730분에 등교를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집에 있는 시간에 딸내미가 등교를 하는데 지켜보지 않고 쿨쿨 자는 것은 아빠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쁜공주가 등교하고 나면 오전 730분부터 8시까지 아침식사를 한다. 우리 집에서 아침식사를 챙겨 먹는 사람은 나와 이쁜공주 둘뿐이다. 우리는 1365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밥을 먹는다. 하지만 전 여사와 곤이는 아침식사를 생략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아침식사를 빠뜨리지 않고 먹는 우리를 전 여사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오히려 아침식사를 거르는 전 여사와 곤이가 이상하다. 우리 부부가 자영업 정글에 뛰어든 이후로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것도 처음에는 섭섭했지만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오전 8시부터 830분까지는 세면시간이다. 치카치카 이를 닦고, 쓱싹쓱싹 낯을 깨끗이 하고, 몸속 노폐물을 시원하게 배출하는 시간이다. 오전 820분경에 전 여사가 집을 나선다. 오전 10시에 가게 영업이 시작되므로 당일 판매할 파스타 면을 삶고, 밥을 해놓고, 야채찹과 야채믹스 등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전 여사가 나보다 먼저 나가는 것이다.

 

오전 830분부터 1030분까지는 하루 중 나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온전히 나에게 100% 투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해 지혜의 폭을 넓힐 수도 있으며,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공부를 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운동도 할 수 있으며, 취미생활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도 있다. 몸이 피곤한 날에는 잠시 눈을 붙일 수도 있으며,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할 수도 있다.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오전 1030분부터 11시까지는 출근시간이다. 안산에서 다닐 때는 오전 8시에 출발했으니 그때에 비하면 자그마치 2시간 30분을 번 것이다. 가게 위치를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두었을 때 누리는 최고의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집에서 가게까지는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20분 빨리 출발하는 것은 도중에 당일 필요한 재료를 사기 위해 마트와 야채가게에 들러야 하기 때문이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화구 작업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다. 고객이 주문하는 메뉴를 조리해야 하는,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또한 이 시간은 하루의 희비가 엇갈리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정신없이 바쁘면 하루가 즐거워지고, 이 시간이 한가하면 하루가 불안해진다. 속으로 일희일비하지 말아야지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매일 정신없이 바쁘고 싶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오후 2시부터 230분까지는 점심시간이다. 일반적인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다. 하지만 음식점 자영업의 경우에는 이 시간이 제일 바쁜 시간이기 때문에 이때 식사를 할 수가 없다. 오후 2시 이후의 점심식사도 오랜 세월 계속 하다 보니 이제는 적응이 됐다.

 

오후 230분부터 3시까지는 화구를 청소하는 시간이다. 창업 후 초기에는 가게 문을 닫은 뒤에 청소를 했으나 퇴근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청소 시간을 앞당기다 보니 이 시간으로 정착됐다. 화구 청소를 너무 빨리 하는 것 아니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차피 하루에 한 번 하는 청소를 조금 앞당겨 하면 저녁 퇴근시간이 그만큼 빨라진다는 점에서 권장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오후 3시가 되면 주방 업무를 마무리하고 홀로 나온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하는 홀 아르바이트생이 이 시간에 퇴근하기 때문이다. 오후 3시부터 퇴근시간까지도 홀이 정신없이 바쁘면 좋겠지만, 내 마음만 그렇고 실제는 그렇지 않다. 비교적 시간 여유가 많다. 이 시간대에도 독서를 통해 지혜의 폭을 넓히거나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를 할 수 있으나, 스마트 폰이 생긴 뒤로는 인터넷 여행으로 시간을 때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는 전 여사가 퇴근한다. 전 여사가 이렇게 빨리 퇴근하는 것은 안산에서 출퇴근하던 시절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며, 인천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나서도 한동안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감히 그 일을 실행했고, 그래도 가게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더 빨리 시도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에 고객이 예상보다 많이 찾아오는 날에는 내가 주방에 들어가 메뉴 한두 가지를 뽑아주고 나온다. 매일 이 시간대에 내가 주방에 들어가 메뉴를 뽑아주고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뭐든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해서 간절히 기도해보지만, 현실은 별다른 변화가 없어 나로서는 계속 간절히 기도만 할 뿐이다.

 

오후 7시부터 730분까지는 저녁식사 시간이다. 나는 처음에는 퇴근하고 집에 가서 저녁을 해결했다. 하지만 일일이 내 저녁식사를 챙겨주던 전 여사가 어느 순간부터 귀찮아하는 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퇴근하고 늦게 밥을 먹어서인지 속이 부대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가게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오후 730분부터 845분까지는 홀을 청소하는 시간이다. 홀 청소 역시 초기에는 가게 문을 닫은 뒤에 화구 청소와 함께 했으나 퇴근이 너무 늦어지는 관계로 청소 시간을 앞당겼다. 홀 청소는 빗자루를 사용하지 않고 대걸레로만 하고 있으며, 홀 전체를 8등분으로 구역화하고 대걸레를 8번 빨아가며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다.

 

오후 845분부터 930분까지는 마감시간이다. 오후 845분이 되면 주 출입구의 셔터를 내린다. 초기에는 오후 10시에 셔터를 내렸으나 이후 조금씩 시간을 조정해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 매장은 대학교 후문 쪽에 위치해 있어 다른 지역의 매장들에 비해 사람들이 일찍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저녁식사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일찍 가게 문을 닫게 된 요인이다.

 

셔터를 내리고 나면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오후 920분까지 설거지를 한 후 다시 홀로 나와 기물대, 음료기, 정수기, 화장실 등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버린 다음 마지막으로 포스 마감 작업을 한다. 영업종료 시간인 오후 930분까지 고객이 남아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 오후 940분을 전후하여 퇴근한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대략 오후 10시 전후가 된다. 간단히 세면하고 당일 수입 및 지출 내역을 정리하고 나면 오후 1030분이 된다. 이때부터 취침시간인 오후 12시까지 1시간 30분 동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시간에도 독서를 통해 지혜의 폭을 넓히거나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를 할 수 있으나 보통 TV 시청으로 시간을 때운다.

 

5학년 4반 중늙은이의 무료한 하루 24시간의 일정을 나열해보았다.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의 하루는 이런 일정에 따라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뭔가 새로운 것을 끼워넣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는 일정이다. 처음에는 이런 무료한 나날이 너무너무 싫었다. 그래서 새로운 탈출구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 무료한 나날도 내가 이겨내고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현실적으로 이 무료한 나날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싫다고 외면하는 것은 내 인생에 마이너스가 될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무료한 나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로 했다. 그저 담담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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