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우가 쓴 『재림』은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2014년 10월 6일 출판한 장편소설이다. 안치우는 1973년 서울 출생이다. 단편 『도도 사피엔스』로 ZA 공모전에서 수상하였으며, 동 작품이 2010년 소설집 『섬, 그리고 좀비』에 수록 발표되며 데뷔하였다. 『재림』은 독고잉걸, 강승주, 권민 등 세 사람의 민간조사원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한국형 본격 탐정 소설이다.
1장 재림 7
2장 만남, 그리고 시작 199
“범인 눈에는 장부책에 적힌 사람들이 예수를 배신한
베드로였던 거죠. 감히 기독교의 신성에 도전한 사탄 종자들.“
의문의 실종에서 비롯된 연쇄살인의 단서.
신성 모독을 핑계로 종교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을 무참히 살해한
광기어린 사이코패스와 그 뒤를 집요하게 쫓는 세 추적자들.
완성된 플롯과 촘촘하게 쌓아올려진 긴장감.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정교한 추리까지
드디어 만나는 한국형 본격 추리소설!
예술가 박진우가 작업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단순 실종으로 여기던 경찰도
강력범죄 흔적을 발견하고 수사에 돌입하지만
그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애만 태우던 가족들은 한 변호사가 탐정일을 겸업하고
있다는 걸 알고 반신반의하며 실종 사건을 의뢰를 한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실종 사건의 진실은……
독 소장 일행이 박진우의 경기도 집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경이었다. 작업실 조사에 이어 골메산 통나무집까지 흝으려면 일찌감치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려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신선한 주변 공기 곳곳에 부침개 자글거리는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독 소장과 승주의 코가 냄새에 반응하는 순간, 두 사람은 온 신경이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다. 한 줄기 욕망이 혀끝을 타고 불꽃을 파팍 터뜨렸다. 그 어떤 본능이 저 냄새를 거부할 수 있으랴, 부침개의 감칠맛을 한번이라도 겪어 본 자라면, 그리고 권민처럼 미각구조조차 무뚝뚝한 특이체질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경천동지할 냄새였다. 독 소장과 승주는 프라이팬 위에서 깨고소한 아우라를 풍기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애간장을 녹일 부침개를 떠올렸다.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는 지라 평소처럼 노닥이지는 않았지만 각자 머릿속에서는 냄새만으로도 오징어니 부추니 새우니 하며 부침개에 들어간 부속재료에 대해 맛있게 떠들어댔다.[p50]
작업실 입구 맞은편 벽에 기대 서 있는 유화 한 점이 시선을 끌었다. 100호쯤 돼 보이는 중대형 작품이었다. 권민은 그림을 응시했다. 첫 눈에는 그저 영감에 의해 급조된 추상화로 보였지만 그 추상성에는 정교하게 계획된 의도가 숨어 있었다. 공포. 밝은색에서 음산한 색감으로 소용돌이치며 꼬여 들어가는 형상은 어떤 입구를 묘파한 것이 분명했다. 비스듬히 비껴 드러난 구멍 형상은 괴수영화에서나 볼 법한 괴물의 아가리보다 더 섬뜩한 냉기를 지그시 흘려보냈다. 무언가 기하학적인 물체가 그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끌리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추상체가 된 것일 뿐 분명 낯잊은 형체였다. 공포에 찬 인간의 눈매. 절망으로 일그러진 안구 두 개가 빛의 속도로 먹혀 들어가는 와중에도 안광을 선연히 번득였다. 안광을 가진 것이 인간만은 아닐 터, 저 불운한 주인공이 덫에 걸린 들짐승일 수도 있겠으나 같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허망한 직감이 권민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평화로웠던 생명체는 입구 안으로 휩쓸리면서 검푸른 안광만을 남긴 채 증오어린 붓질 속으로 흩어져버렸다. 칠흑색의 습격으로 얼룩덜룩 뜯겨진 선홍색 소용돌이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제목도 인장도 없는, 그린 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림 자체만으로 그린 자의 결기를 분연히 일갈하고 있을 뿐이다.[p51]
흐릿해진 하늘 언저리에서 햇볕이 정색하며 움츠러들더니 소나기가 느닷없이 쏟아져 내렸다. 먹빛과 햇빛이 오락가락 겨루다가 결국 비구름이 얄팍한 햇살 파편들을 모조리 삼켜버리며 비보라로 급습했다. 앞뜰에서 무방비하게 노닥이던 등산객들이 대피소의 좁다란 처마로 몰려갔다. 옆에 앉은 노부부에게 산속 마을이 있는지 묻고 있던 승주는 소나기 세계에 낭패감을 곤두세우며 벌떡 일어섰다. 권민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녀의 옷차림새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날씨에 대비한 등산객 몇몇은 배낭에서 우비를 꺼내 입었다. 노부부는 그러게, 내가 뭐랬어, 갖고 오자니까, 나직이 툴툴거리며 우악스레 튕겨 들어오는 빗줄기를 피해 평상 안쪽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대피소 주변을 재차 눈더듬고 있는 승주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짙은 감색 우비를 뒤집어쓴 권민이 빗방울 파편을 얻어맞고 있는 승주 얼굴을 심드렁히 마주보며 말했다.[p80]
비바람 기세가 잦아들기는커녕 몇 갑절로 심술 사나워졌다. 하늘 먼발치서 번개 치는 소리까지 웅얼거리더니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번개의 끝자락이 먹구름 언저리에서 찌릿찌릿 뻗치며 숲 속 틈바구니로 흩어졌다. 돌개바람이 내는 소음이 하도 거칠어서 마치 야유 소리를 고음으로 질러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돌풍 덕분에 질량이 배가된 빗줄기는 승주가 쓴 우산을 오그라뜨리거나 발라당 뒤집어 놓으며 그의 옷과 얼굴을 향해 권투 잽 날리 듯 얍삽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승주는 스틱으로 바닥을 짚으랴, 우산까지 받쳐 쓰랴 운동신경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산책 나온 듯이 홀로 공중 부양해 앞서 나가고 있는 권민이 얄밉기까지 했다.하산하자마자 최고급 우비를 사서 1년 내내 품고 다니리라, 객소리를 다짐하며 종아리에 애써 힘을 실어 진흙탕을 내디뎠다. 승주는 과욕이 일떠서더니 권민과 나란히 가려고 걸음발을 재촉했다.[p83]
스쿠터가 주택가 길목을 지나 교회 철문 앞에 도착했다. 대형 십자가를 희번덕이는 육중한 돌탑 마천루가 야산이 뭉텅 깎인 자리 위에 도도하게 꽂혀 있었다. 자잘한 주택가 사이에서 거대하게 튀어나온 교회는 지하세계에서 방금 깨어난 고대괴물의 성난 등짝처럼 보였다. 언제라도 고개를 휘돌려 가정집들을 향해 불기둥을 내뿜을 것 같은 위압적인 모습이었다.[p158]
“저나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나눔을 실천한다고 해도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어요. 세상에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주에 있는 수많은 별을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불행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절망의 끝으로 내몰린 그들에게 하나님은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불행한 아이들, 내가 돕지 못하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지푸라기가 되주는 존재.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차저 없으면 그 사람들은 돌멩이와 다를 바 없는 자투리 인생에 지나지 않겠지요. 인간에게 그보다 더 큰 절망이 있을까요?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버리는 인생만으로 모든 게 끝이라면 너무나 가혹한 일입니다.”[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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