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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내가읽은책

익명작가

by 유일무이태인 2024.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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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앤드루스 지음, 이영아 옮김의익명작가는 출판사 인플루엔셜에서 202333일 출판한 장편소설이다. 알렉산드라 앤드루스는 뉴욕과 파리에서 저널리스트, 편집자,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다. 익명작가는 정체를 숨긴 베스트셀러 작가를 둘러싼 출판계의 신경전, 재능의 한계에 부딪친 작가 지망생의 음울함, 범죄 심리를 세련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추리 스릴러 소설로서 프롤로그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 009

1013

2087

3155

4201

 

 

 

더 나은 인생을 바란다면 노력했어야지,

훔칠 게 아니라.“

 

지긋지긋한 삶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 누리고 싶었다.

---- 그러러면 우리 중 하나는 죽어야 하겠지만.

 

언젠가 대단한 작가가 될 거라 굳게 믿었던

지망생 플로렌스는 뉴욕의 유명 출판사에 입사한 후

자신의 초라함을 실감한다.

뒤처진다는 조바심에 상사의 약점을 잡아 책을 내보려다

직장마저 잃은 그녀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온다.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한 초대형 베스트셀러 <미시시피 폭스트롯> 작가인

모드 딕슨의 보조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것.

본명도 거주지도 성별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작가의 정체를 하는

유일한 사람이 될 기회.

천재 작가의 성공 비결을 훔친다면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생도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플로렌스는 묘한 흥분감에 제안을 수락한다.

 

 

플로렌스가 매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 눈에 제일 먼저 띄는 건 언제나 창백한 안색이어서, 그녀를 플로리다의 햇살 아래가 아니라 지하 벙카에서 자란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엉뚱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증거라고, 그녀는 내심 흐뭇해했다. 흰 피부는 수줍음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모를 이유로 툭하면 붉어졌다. 창조주가 그녀를 만들 때 순수함과 삐딱함이라는 두 충동 사이에서 갈등하기라고 한 것처럼 이 점이 어떤 남자에게는 매력으로 다가갔지만 대부분은 좋아하지 않았다.[p17]

 

플로렌스는 시대가 요구하는 분노에 공감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다른 이들과 함께 분노할 수 없으니 무슨 일에서든 소외될 때가 많았다. 이 분노란 것은 사람들을 한데 붙여주는 접착제 같았다. 연인들, 친구들, 그리고 대부분의 미디어 기업이 표적으로 삼는 사람들. 거리에서 서명 운동을 벌이는 젊은 사람들조차 플로렌스의 선천적인 자기중심주의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그녀를 무시했다.[p23]

 

등받이에서 스르르 떨어지는 외투처럼, 그녀의 자아감도 아주 쉽사리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플로리다의 소녀에서 탈피하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까>? 그녀는 마치 옷을 갈아입듯 이런저런 분위기와 성격을 시험해보았다. 어느 날은 몰인정한 사람이 되어볼까 싶었다. 그다음 날은 동경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새로운 부츠, 리퀴드 아이라이너, 그리고 베레모가 그녀를 변신시켜주리라 믿었다. 금연 패치를 붙이면 몸속으로 니코틴이 스며들 듯, 정체성도 밖에서 안으로 스며들 수 있지 않을까.[p53]

 

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 플로렌스는 지난밤까지의 자신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죽은 발톱은 밑에서 자란 발톱에 밀려나는 법. 예전의 그녀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이질적이고 발가벗겨진 무언가가 있었다. 몇 달 동안 그녀 자신도 모르게 계속 쌓여온 무언가가 압력을 이기지 못해 밖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p78]

 

초봄의 밝은 햇살에 눈 위를 손으로 가리니, 저 멀리 잔뜩 낀 먹구름이 보였다.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그녀는 더플백을 어깨에 메다가 그 무게를 못 이겨 잠깐 휘청거렸다. 가구를 뺀 그녀의 모든 소유물이 가방에 들어 있었다. 매트리스와 책상을 중고 판매 웹사이트에서 팔려고 해봤지만, 가격을 0달러로 낮춘 후에야 겨우 처리할 수 있었다.[p89]

 

누구나 짐작할 만한 뻔한 방법이었어요.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다음, 똑같이 연기하는 거죠. 아주 오랫동안 그런 척하다 보면 자연스러워지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그런 사람이 되는 거예요.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으면 오페라를 듣거나 비싼 와인을 즐기긴 어려우니까.[p129]

 

그녀가 세상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책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반지의 제왕>에 푹 빠졌다.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달아나는 것이 즐거웠다. 그녀가 작가의 꿈을 품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광대함을 손안에 품고 싶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온 세상을 빚고 싶었다.[p136]

 

플로렌스는 돌아올 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는, 이번 여행으로 자신이 달라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변화는 매끄러운 곡선이 아니다. 급격한 도약과 충격이 있고, 정체기와 안정기가 있다. 예전의 내가 사라진 후 새로운 내가 정착하기 전의 시기에는 면책 특권이라도 받은 듯한 느낌이 있다.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내가 아니다. 아무도 아니다.[p153]

 

메디나로 들어가는 가장 혼잡한 성문들 중 하나인 밥 엘 즈디드를 지나자, 쿠투비아 모스크의 첨탑이 무척이나 세밀한 뇌문 세공을 뽐내며 우뚝 솟아 있었다. 꼭대기에 도금된 구체 네 개를 차례로 쌓은 그 탑은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보였다. 플로렌스는 12세기에 지어진 원래의 모스크가 완전히 철거되고 정확히 메카를 향하는 방향으로 재건되었다는 사실을 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의 호텔은 모스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p160]

 

잠에서 깨어난 플로렌스는 머리가 아프고, 비쩍 마른 입에서 신맛이 났다. 짙은 안개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이불은 축축하고 헝클어져 있었다. 어제 솟구쳤던 아드레날린의 여파가 혈관 속에서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꿈을 기억하려 해봤지만 꿈들은 물고기처럼 잽싸게 도망쳐버렸다. 뛰었던 것 같은데, 무언가에 쫓겨서.[p166]

 

모든 이야기는 현실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어야 하죠. 안 그러면 진정성이 안 느껴지니까. 하지만 물론 현실은 이런저런 모양으로 바꿀 수 있어요.[p183]

 

평생 공정함을 찾아봐야 실망만 하게 된다니까. 공정함이라는 건 없어요. 있다면, 세상이 지루해지겠죠. 뜻밖의 사건 같은 건 전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름다움, 예술, 초월성 같은 위대한 것들을 추구하면 보상이 따를 거에요. 그래야 사는 보람이 있죠.[p186]

 

죽음은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지만, 일단 일어나고 나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죽음의 의미는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진다. 그 충격은 살아남은 자들 사이로 퍼져나간다.[p222]

 

플로렌스는 돌처럼 굳었다. 분노와 욕망 같은 감정들은 시간의 속도를 높인다. 하지만 충격은 순식간에 세상을 멈춘다. 지나가는 순간들의 바깥에 새로운 시간 지대가 만들어진다. 그 사이 우리의 마음은 지금까지 다녔던 신경 통로를 벗어나 새로운 통로를 열어젖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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