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내 기억 속에 설거지는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명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남자가 해야 할 일과 여자가 해야 할 일이 구분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설거지는 후자의 경우였으며,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쪼잔한 인생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시절로 기억난다.
이런 저런 연유로 인해 결혼하기 전까지 설거지를 해본 기억이 없다. 결혼하고 나서도 초반에는 설거지는 와이프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와이프가 첫 아이를 임신하고 힘들어 할 때 설거지를 해 본 기억이 난다. 서툴지만 세제로 깨끗이 그릇들을 닦았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또다시 부엌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주 되차게 설거지를 한 시절도 있었다. 자영업을 하던 시절이다. 인생나이 5학년 때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하고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10년간 운영했다. 음식점이다보니 그릇과 수저세트를 세척해야 한다. 세척기를 이용하지만 불가피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누가 전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시간과 상황이 맞으면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설거지를 정말 지겹게 한 것으로 기억난다.
앞서 결혼하기 전까지 설거지를 해본 기억이 없다고 했는데 이건 거짓말이다. 가만히 기억을 되새겨보니까 군 시절에 설거지를 해 본 기억이 떠오른다. 발칸포대에서 군 복무를 마쳤는데 진지생활을 하면서 짬밥을 소대원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근무인원이 8명 미만인 관계로 제대 전까지 주방 일을 해야 했다. 일주일간 돌아가면서 주방 일을 하였는데 2달에 1번 내지는 2번 주방장 업무를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때 밥하는 것보다 설거지 하는 것을 더 싫어했던 것 같다.
자영업 정글에서 탈출하고 설거지하고는 담을 쌓고 살고 있지만 가끔 전 여사가 바쁘고, 이쁜공주가 일이 있어서 미처 설거지를 하지 못할 때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해놓는 경우가 있다. 이젠 설거지는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횟수는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서 설거지를 해야 할 경우에는 망설이지 않고 빨간 고무장갑을 낀다. 그 횟수가 어쩌다 한 번 이지만 기꺼이 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만물박사 > 인생을 쓰는 법 연습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나? (0) | 2023.06.27 |
---|---|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 (0) | 2023.06.09 |
젤리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해 보라 (0) | 2023.06.02 |
커피 마시는 습관 (0) | 2023.05.25 |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는 언제인가? (0) | 2023.05.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