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전래민화가 있다. 그 내용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심성 착한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준다. 사슴은 은혜를 갚기 위해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는 곳을 알려준다. 나무꾼은 목욕하고 있는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어 선녀를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아내로 맞이하여 행복하게 잘 산다. 그러나 나무꾼은 아이 셋을 낳기 전에는 숨겨둔 날개옷을 선녀에게 보여주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 결국 선녀는 날개옷을 입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버린다.
“전생에 무엇이었나요?”
“선녀요.”
나는 이성과 이야기를 할 때 전생을 물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열이면 아홉은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오물거렸다. 그러면 나는 “나는 먼 옛날에 대감 집 자제였고, ○○씨는 나를 모시는 몸종이었는데 내게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내세에서는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해보겠다는 꿈을 꾸며 죽었어. 지금 그 꿈을 이룬 거야”라며 되지도 않는 소설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전 여사는 달랐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전생에 자기가 선녀였다고 말했다. 그 순간 전생에 대감 집 자제였던 나는 나무꾼이 되기로 했다.
결혼적령기가 되었는데도 여자를 만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내가 못 미더우셨는지 어머니께서 맞선을 주선하셨다. 세 번째 맞선에서 만난 여성이 전 여사였다. 별 생각없이 맞선 자리에 나간 나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습관적으로 전생을 물어보았고, 선녀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의 신선한 느낌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무조건 전 여사가 좋았다. 첫사랑의 여자 이후 처음으로 나의 감성을 건드린 이성이었다. 나는 전 여사의 나무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절대 날개옷은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아니, 전 여사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 하도록 아예 날개옷을 태워버렸다. 전 여사는 좋으나 싫으나 나와 계속 살아야 한다.
나와 만나 뒤로 전 여사가 선녀로서의 우아함을 잃지 않고 지낸 기간은 연애 기간 2년 남짓이 전부였다. 결혼과 함께 우리는 다세대주택의 전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사랑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은 전 여사는 선녀에서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변신했다. 내가 가져다주는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빠듯했기에 부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와 같이 자영업 정글에 뛰어들어 1인 3역을 해내고 있다. 내가 남에게 빚지지 않고 곤이와 이쁜공주를 공부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녀의 옷을 벗어던지고 억척 아줌마가 된 전 여사가 내 곁에 있어준 덕분이다.
전 여사는 눈물이 많다. 슬픈 드라마나 휴먼 다큐멘터리, 인생극장 등을 볼 때면 시도 때도 없이 눈물부터 흘린다. 내가 아무리 놀려대도 전 여사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런 전 여사를 보며 생각한다. 전 여사가 날개옷 찾기를 포기한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내가 서러운 인생극장의 주인공이 될까봐, 그것을 차마 내려다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하고.
나는 다음 생에도 전 여사와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전 여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전 여사는 다음 생에는 절대 나무꾼이 자신의 날개옷을 훔쳐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화의 내용을 바꾸어, 멋있는 왕자가 자신의 날개옷을 가져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나도 전 여사가 다음 생에는 잘나가는 남편을 만나 손에 물방울 하나 묻히지 않고 편하게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는 죽을 때까지 전 여사에게 부유한 삶을 선사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가난 이외의 것으로 인해 마음고생 하는 일은 결코 없게 할 것이다. 가난이 살아가는 데 불편을 주긴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해야 한다는 데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전 여사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하다.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욕심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며 매일매일 웃으며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라는 나의 개똥철학에 시나브로 물들어버린 전 여사는 오늘도 억척 아줌마의 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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