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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정글/5학년 중늙은이의 희노애락

22대 5

by 유일무이태인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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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는 핸드볼 스코어다. 이기고 있는 팀의 감독은 후보선수를 내보내면서 여유롭게 경기가 종료되기를 기다리지만, 지고 있는 팀의 감독은 초조함과 자포자기가 뒤섞인 마음으로 빨리 경기가 종료되기를 기다리게 되는 스코어다. 누구나 5가 아닌 22 쪽 팀의 감독이 되고 싶어 한다.

 

225라는 핸드볼 스코어는 우리 인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치는 아니다. 이 흔치않은 225가 지금 내 삶의 전광판에 떴다. 22는 내가 직장생활을 한 햇수이고, 5는 내가 자영업 정글에서 버텨낸 햇수다. 22는 멈춰섰지만 56이 되고 7이 되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522를 넘어서 23이 되고 24가 되기를 기대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도전하고 싶다.

 

22년의 직장생활을 되돌아보면 유쾌한 기억보다는 가슴 쓰린 기억이 더 많다. 취업의 좁은 문은 예나 지금이나 취업준비생을 곤혹스럽게 한다. 상아탑은 시간만 주었지 그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을 소홀히 다룬 나는 모두가 선망하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문을 두드려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당장 눈앞의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남들 다 하는 영업을 나라고 못 하겠느냐는 심정으로 뛰어들었지만, 수습기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었다. 한마디로 영업 쪽으로는 젬병이었다.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었지만 점점 움츠러드는 나 자신을 보는 게 힘들었다. 결국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잘못된 단추를 풀고 다시 끼웠다. 이번에는 전공을 살려 잡지사의 문을 두드렸다. 신이 났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을 오래 맛볼 수는 없었다. 영세한 잡지사는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16개월 동안 적을 둔 잡지사만 3군데였다. 잡지사의 생명력은 생각 이상으로 허약했다.

 

대학 졸업 후 그렇게 2년을 허비했다. 난감했다. 영세한 잡지사의 문을 계속 두드리는 건 의미 없는 일 같았다. 앞날에 대한 갈등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한줄기 빛이 찾아들었다. 처음 인연을 맺었던 잡지사의 영업부장이 소개해주어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회사에 취업하게 됐다. 담당 업무는 사보 제작이었다. 제법 안정된 기업인데다 전공도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2년의 허송세월을 거울삼아 남들보다 2배 이상 노력했다. 진정성을 인정받아 업무영역도 사보 제작에서 총무, 인사 업무로 넓혀갔다. 그저 고마웠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근무한다는 사실에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

 

정년까지 한 우물을 파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맹세는 단 한 번의 달콤한 유혹에 깨져버렸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7년차의 어느 따스한 봄날, 인천에 있는 2년제 대학의 관계자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교직원이라는 신분이 주는 안정감과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쁨, 그리고 회사보다 높은 연봉 등 달콤한 조건들은 나를 오래 고민하지 않게 했다. 서무과에서 2년을 근무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 기간은 최악이었으며, 22년 중 가장 기억하기 싫은 2년이었다. 담당 업무도 할 만했고,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도 더없이 좋았다. 그러나 이사장 일가의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내지 못했다. 학교를 개인의 사유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서 일을 시켰다. 교직원의 생살여탈권을 손에 쥐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댔다. 세상이 결코 좋은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했다.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직장생활의 연속이냐, 자영업 정글의 첫걸음이냐? 매일매일 바뀌는 마음을 누르고 3개월 동안만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로 했다. 받아주는 곳이 없으면 미련을 버리고 자영업 정글에 뛰어들기로 했다. 인천과 안산의 고용센터에 서류를 넣어두고 구직활동을 펼쳤다.

 

며칠 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옛 직장에서 자리가 비었으니 다시 와서 근무해달라고 했다.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제의를 바로 받아들였다. 거기서 여전히 나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나의 직장생활은 이렇게 해서 한 번 더 연장됐다. 모두가 반겨주었다. 잠시 파견근무를 갖다 온 것처럼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기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한눈을 팔지 않고 정년까지 근무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세상사가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설픈 필설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고, 재입사 6년 만에 정년까지 근무한다는 꿈을 접어야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었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인 만큼 직장에 연연해하지 말고 평생직종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이것이 공인중개사에 도전한 이유였다. 1년을 준비하여 자격증을 취득했으나, 사무소를 개설하는 대신에 한 번 더 직장생활을 연장하게 됐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에 구직서류를 넣어두었는데, 거짓말처럼 1년이 지난 뒤에 인천에 있는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나는 공인중개사로서 살아갈 앞날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에 두 눈 딱 감고 직장생활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두 번이나 쓴 경험을 했으니 새로이 직장생활 기회를 준 회사에서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나자신에 대한 서약서를 만들어 출퇴근길에 읊조려 보았으며,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여 7시에 출근해 다른 직원들보다 먼저 업무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쳤음에도 만 5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출됐다. 직장생활의 연장 여부는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임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더 이상 직장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러는 것은 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미루어두었던 자영업 정글에 첫발을 내딛는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공인중개사 사무실 개설을 우선순위로 검토했으나, 여기서는 전 여사의 반대에 부딪혔다. 생활비도 문제였지만 곤이와 이쁜공주의 교육비가 더 큰 숙제였다. 당시 부동산 시장에서는 공인중개사가 사무실을 차리기만 하면 돈을 긁어모으던 호시절은 물 건너간 뒤였고, 침체기를 맞아 모두가 힘겨워 하는 시기였다. 그래도 먹는장사를 하면 몸은 힘들어도 생활비는 물론 교육비도 무난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 여사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음식점 자영업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몸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었으나,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주방 일을 하는 것이 스스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4년 동안 자학하며 살았던 것 같다. 자긍심이 일어나기는커녕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찜찜한 기분의 연속이었다.

 

자영업 정글 5년 차에 접어들면서 정신을 차렸다. 자학하며 사는 것은 인생을 더 슬프게 만드는 것이라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삶을 다시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자투리시간을 잘만 활용하면 자영업 정글의 삶이 직장생활보다 더 여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영업 정글 5년차가 되니 절망의 틈새로 슬그머니 희망이 비쳐들었다.

 

5 이후로 숫자를 얼마나 더 써넣을 수 있을까? 앞으로 변화를 거듭할 나의 미래가 궁금하다.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암울한 회색빛 또한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22의 숫자까지 쓰는 동안 겪은 아픔을 앞으로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못난 처지를 자학하지도 않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소중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매일매일 파이팅하면서 사는 것이 현재의 목표다. 아자,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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