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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정글/자영업정글에서의 생존전략

해답 없는 인력관리

by 유일무이태인 202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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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 정글에 뛰어든 뒤에 가장 곤란했던 부분은 인력관리였다. 답이 없었다. 운이 따르면 좋은 사람을 만났고, 운이 따르지 않으면 그저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그나마 홀과 몰이 쪽에서는 운이 따른 편이었으나 화구 쪽에서 매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화구쪽에서는 출발이 순조로운가 싶었으나 한 학기가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25살의 젊은 처자가 6개월 만에 그만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젊은 처자가 하기에 힘든 일이었기에 오랫동안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년도 채우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두 번째로 인연을 맺은 사람은 불혹의 중년이었다. 일 년 이상 근무할 수 있다고 해서 흔쾌히 손을 잡았으나, 그도 5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렇게 오픈 첫해에 2명이 거쳐가면서 화구 쪽 인력관리의 흑역사가 시작됐다.

 

2년차에는 전역 후 복학하기 전에 1년간 등록금을 마련하고자 일자리를 찾는 한 젊은 친구와 인연이 닿았다. 취사병 출신에 조리학을 전공하는 친구였기에 별도의 조리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심성도 좋은 적격자였다. 내심으로는 처음 약속처럼 복학할 때까지 근무하기를 바랐으나, 그도 지병인 아토피가 심해져 치료를 받아야 했기에 6개월 만에 헤어지게 됐다. 다행히 그는 자신과 같이 취사병 출신에 조리학을 전공하는 친구를 소개해주고 일을 그만뒀다. 그 덕에 2년차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2년차는 가장 어려움 없이 보낸 해였다.

 

3년차는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2년차를 함께했던 친구들처럼 취사병 출신에 조리학 전공인 사람을 만나고 싶었으나 그것은 우리의 바람일 뿐이었다. 구인광고를 내고 적임자 찾기에 나섰다. 성격 좋아 보이고 의욕 넘치는 친구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메뉴 레시피를 암기하는 데 어려움을 보여 보름 만에 손을 들었다. 화구 작업 쪽으로 문외한이던 나도 적응했기에 누구나 다 쉽게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구 작업이 누구나 다 적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3년차의 첫 번째 단추가 잘못 끼워지자 두 번째 단추도, 세 번째 단추도 연달아 어긋났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취사병 출신이었다. 2년차를 떠올리며 내심 기대를 했지만 착각이었다. 두 번째 친구는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지 못하는 수면질환 때문에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세 번째 친구는 처음 한 달 동안에는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한 달 후부터 특별한 이유 없이 지각하는 등 불성실한 근무태도를 보이더니 어느 날 갑자기 연락 한 통 없이 출근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처남과도 오해가 생겼다.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처음에 매장을 열 때부터 함께하며 큰 도움을 주던 처남은 끝내 매장을 떠나고 말았다.

 

자영업 정글에 뛰어든 이래 최악의 해였다. 그렇다고 문을 닫을 수도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사람을 구했다. 다행스럽게도 전역 후 일자리를 찾는 한 친구와 인연이 닿았다. 일단 한숨을 돌리고 다시 처남의 빈자리를 채워줄 적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취사병 출신에 조리학 전공자와 인연이 닿아 9월 개강 시즌을 차질 없이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리학 전공자는 부모님이 천안으로 활동지역을 옮기면서 2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 정말 복이 지지리도 없는 해였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구하지 않고 2명이 화구 작업을 해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모험이었다. 처음엔 두렵고 어색했으나 이내 익숙해졌다.

 

4년차의 3월 개강 시즌을 앞두고 화구 인원을 보강할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둘이서 하는 것으로 밀어붙였다.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기우였다. 둘이서 조리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으며,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오히려 세 사람이 할 때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업을 하게 됐다. 이쯤 되자 오픈 첫해에는 사람이 더 필요했지만 2년차부터는 화구 작업을 2명이 맡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즉에 인원을 줄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은 본사의 무관심이 섭섭했다.

 

4년차는 순조롭게 흘러가는가 싶었다. 그러나 함께 일하던 친구가 바리스타 공부를 하겠다며 떠날 의사를 밝혔다. 내가 보기에는 주방 조리사나 바리스타나 도긴개긴 같은데 그 친구에게는 바리스타가 훨씬 나아 보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주방 일이 젊은 친구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아닌 듯해 그를 붙잡지 못했다.

 

주방 일은 젊은 사람보다 아줌마가 더 잘하지 않을까?” 젊은 친구들이 죄다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둬서 속상하다는 내 하소연을 듣고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구인광고에 주부사원 가능이라는 문구를 써넣었다. 이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민준 엄마였다.

 

민준 엄마는 IMF 사태로 남편의 사업이 타격을 받아 부득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다고 했다. 주방 일은 해보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겠다며 강한 의욕을 보이는 그녀와 함께하기로 했다.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처음 주방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일을 습득했다. 1주일 만에 기본을 다 숙지했고, 1달 만에 1년 일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며, 3개월 만에 12역을 할 정도였다. 여성의 몸으로 힘들 만도 한데 힘든 기색을 내비친 적이 한 번도 없다.

겨울방학을 맞아 가게가 한가할 때였다. 민준 엄마는 남편의 사업 관계로 중국에 갔다 와야 한다며 한 달만 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동안 일을 너무 잘해 주었고, 방학 비수기 때 최소 인원으로 운영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전 여사도 이 기회에 화구 작업을 완전히 손에 익히겠다며 단단히 벼렸다. 그리고 마침내 전 여사는 민준 엄마의 빈자리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화구작업을 완벽히 소화했다.

 

한 달은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갔다. 민준 엄마가 출근하기 사흘 전에 연락을 해왔다. 중국에서 조류독감에 걸려 제 날짜에 출국하지 못해서 엊그제에야 한국으로 돌아와 입원치료 중이니 며칠 더 쉬고 나오겠다고 했다. 치료가 먼저였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전 여사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호소했지만, 나는 염려하지 말라며 전 여사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여사의 불안은 현실이 됐다.

 

아휴, 죄송해요. 입이 안 떨어지네요.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출근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3월 개강을 사흘 앞둔 2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 민준 엄마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해왔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으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었다. 바쁜 시즌을 코앞에 두고 갑작스레 그만두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진심으로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서운했다.

 

잠시 멘붕에 빠졌지만 곧 정신을 다잡았다.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새로운 사람을 구해서 일을 가르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궁리 끝에 2년차에 같이 일했던 승효와 희동이를 떠올렸다. 둘은 복학으로 일을 그만둔 후에도 가게에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와서 도움을 준 친구들이었다.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해보았다.

 

승효는 취업하여 직장에 잘 다니고 있었으나, 희동이는 첫 직장과 궁합이 맞지 않아 사직한 후 구직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구사일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희동이가 급한 불을 꺼주기로 했다. 3월 한 달만 도와주기로 한 희동이는 6월 말까지 자그마치 4개월이나 도와주고 새 직장을 구하여 떠났다. 희동이에 대한 고마움은 지금도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희동이가 떠난 후 인력 운용에 변화를 꾀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는 종일 근무자 대신에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일하는 파트타임 근무자를 구했다. 40대 주부와 인연이 닿았다. 민준 엄마와 같은 사람이기를 기대했으나,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2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허리통증을 핑계로 그만뒀다. 후임으로 계속해서 파트타임 근무자를 찾아보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9월 개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파트타임 근무자만을 고집할 수 없어 종일 근무자를 함께 찾았다. 군 전역 후 일자리를 찾고 있던 동종 업계 유경험자를 만나게 되어 바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 친구도 집안 사정을 핑계로 2개월 만에 훌쩍 떠났다. 부랴부랴 구인광고를 내고 다시 40대 주부를 채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출근 약속일 하루 전에 근무하기 어렵다는 연락을 해왔다.

 

우리 이제 더 이상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맙시다. 내가 마감까지 할 테니까 가타부타하지 말고 내 뜻대로 합시다.”

 

내가 인력관리에 해답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절망하고 있을 때 전 여사가 말했다. 민준 엄마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운 전 여사이기에 가능한 선언이었다. 이로써 화구 담당 구인의 흑역사는 막을 내렸다. 우리는 6년차 3월 신학기 시즌도 인원을 보강하지 않았고, 그러고도 별 탈 없이 보냈다.

 

우리 가게에는 5년차 가을부터 5명이 근무하고 있다. 인건비가 줄긴 했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우리에게 5는 매출이 정체된 상태에서 반등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숫자다. 오픈 첫해의 영광을 다시 누릴 수는 없겠지만, 2년차 정도만이라도 매출이 회복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인건비가 더 나가더라도, 구인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게 되더라도 6명이 지지고 볶으며 일할 수 있는 매출 구조였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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